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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VS 선동렬 누가 더 레전드?

노노마진7 2025. 5. 12. 10:59
최동원 VS 선동렬 누가 더 레전드?

 

 

 

최동원: 부산의 불멸(不滅) ‘철투왕’
최동원은 1958년생으로, 부산 동래고를 거쳐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며 본격적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데뷔 이듬해부터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했고, 특히 1984년 시즌은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에 길이 남을 전설을 쓰는 해였다. 그는 그 해 284.2이닝을 책임지며 무려 223개의 삼진을 낚아채는 데 성공했고, 평균자책점 2.40, 20승(1패)의 압도적 성적으로 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승률 등 투수 부문 4관왕을 차지했다.

 

최동원이 진정으로 ‘레전드’로 살아 있는 이유는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투구와 경기 운영 능력에 있다. 그는 흔들림 없는 컨디션 관리로 시즌 내내 매주 등판을 거부감 없이 소화했으며,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해에는 한 경기에 두 번 등판하기도 하는 이른바 ‘철투(鐵投)’의 표본을 보여 주었다. 선발 완투율이 높은 것도 그의 특징 중 하나로, 당시 롯데의 경기력 기복 속에서도 마지막 아웃카운트까지 마운드를 지키며 동료 야수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은 롯데가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펼친 일곱 경기 내내 네 번의 선발 완투(그중 한 경기는 구원 등판)를 기록하며 전승을 이끌었다. 40이닝 동안 단 1패도 허용하지 않고 평균자책점 1.80을 기록한 그의 투구는 ‘야구 황제’라는 수식어가 결코 과장되지 않음을 입증했다. 이 전설적 활약 덕분에 최동원은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으며, 이 기록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그는 단지 위력적 구종만 지닌 투수가 아니었다. 강속구와 함께 변화구의 제구가 탁월해, 타자들이 노림수를 잡기 어려웠다. 한 예로 결정구로 사용한 슬라이더는 타자 가슴팍에서 휙 꺾이며 헛스윙을 유도했고, 포크볼로 낮은 존을 공략해 땅볼 유도율을 높였다. 심리전에도 능해, 대기타석에서 천천히 목 근육을 풀거나 짧게 호흡을 가다듬어 타자들의 긴장감을 부추기곤 했다.

통산 성적은 103승 74패, 평균자책점 2.46, 탈삼진 1,019개, 26세이브. 여기에 롯데 구단 최초의 National Baseball Hall of Fame 헌액(한국야구명예의전당)이라는 영예까지 더해져, 그의 이름은 한국 야구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전설로 남았다.

 

 

 

 

 

선동렬: 정교함의 극치 ‘제구의 마에스트로’
선동렬은 1963년생으로, 광주일고를 졸업한 뒤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좌완 정통파로 출발해 가장 돋보였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제구력’이었다. 그는 직구 구속이 140km/h대 초중반에 그쳤지만, 낮은 위치의 스트라이크존을 정교하게 파고드는 능력으로 타자의 방망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선동렬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떠오른 결정적 계기는 1991~1992년 두 시즌 연속으로 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승률 4관왕을 달성한 순간이다. 이후 1994년에도 4관왕을 재차 차지하며 극강의 기량을 과시했다. 통산 기록은 146승 67패(1무), 평균자책점 2.16, 탈삼진 1,698개. 경기당 삼진 비율은 물론, 장기 부진 없이 꾸준히 상위권에 머문 내구성을 높이 평가받았다.

그의 주 무기는 날카로운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이었다. 슬라이더는 오른손 타자의 바깥쪽 낮은 존에서 휘어져 들어와 헛스윙을 유도했고, 체인지업은 속도 차만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아내는 무기였다. 여기에 심리전까지 곁들여, 마운드 위에서는 늘 차분하게 중심을 잡았다. 투구폼이 거의 일정해 포수와의 사인 플레이도 망설임이 없었고, 상황별로 구종과 코스를 달리하면서 타자의 예측을 완전히 봉쇄했다.

선동렬은 팀을 한국시리즈 5회 우승(1986·1987·1988·1991·1993)으로 이끌며 해태 왕조를 유지하는 원동력이었다. 1986년 신인 시즌부터 정규시즌 MVP에 도전할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활약을 보였고, 정규시즌과 포스트시즌 전 과정을 통틀어 핵심 선발로 100이닝 이상을 꾸준히 소화했다. 특히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2차전·5차전에 선발 등판해 모두 승리투수가 된 모습은 ‘팀 승리의 분수령’을 책임진 장면으로 회자된다.

은퇴 후에도 그는 지도자 역할을 맡아,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2009 와일드카드 WBC 준우승 등의 국제 대회에서 대표팀을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젊은 투수들에게 ‘정확한 제구』『멘탈 관리』『투수로서의 자기 절제』 등을 강하게 각인시켰다.


비교 1: 경기 스타일과 투구 철학

  • 최동원은 ‘타자를 상대할 때 철저히 지치게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압도적 이닝 소화력과 구위로 매 이닝 상대의 방망이를 꺾으며, ‘완투 투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의 투구 철학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였다.
  • 선동렬은 ‘하나의 구종도 허투루 던지지 않는다’는 정교함이 키워드였다. 정확한 제구로 볼카운트를 유리하게 이끌고, 최적의 구종 선택으로 타자의 방망이를 교란시켰다. 그의 모토는 “스트라이크존을 놓치지 말자”였다.

비교 2: 기록과 경쟁력

  • 탈삼진과 피안타율: 최동원은 1,019탈삼진, 생애 피안타율 0.238로 ‘구속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이었다. 선동렬은 1,698탈삼진, 피안타율 0.215로 ‘제구력으로 삼진을 잡아내는’ 투수였다.
  • 평균자책점: 최동원 2.46 vs 선동렬 2.16. 숫자상으로는 선동렬이 약간 우위에 있지만, 데뷔 연도와 리그 환경이 달랐음을 감안해야 한다.

비교 3: 팬덤과 문화적 아이콘

  • 최동원은 부산 시민에게 ‘영원한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매 경기 전 부산 시민들로 가득 찬 사직구장에서 그는 ‘부산의 아들’로 여겨졌다. 그의 등판일이면 거리 응원, 부산 사투리 응원가가 울려 퍼졌고, 지금도 그를 기리는 동상과 동명의 봉사 단체가 운영 중이다.
  • 선동렬은 광주일고·해태 시절 호남 팬덤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국구 스타였고, 특히 지도자로서 전국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팬들은 그를 ‘야구 교과서’라 부르며, 그의 제구 훈련법을 지금도 청소년 야구 교실에서 가르친다.

결론: 서로 다른 매력, 공존하는 레전드
두 사람 모두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투수 레전드지만, 그 매력과 역할은 서로 다르다. 최동원은 ‘극한의 투지’를 상징하는 완투왕이자 드라마틱한 순간의 아이콘으로, 팬심을 울리는 영웅이다. 반면 선동렬은 ‘정밀 제구력’의 대명사이자, 끊임없이 반복된 일관성과 팀 승리에 대한 헌신으로 ‘투수교과서’라 불린다.

  • 한국 야구 역사에는 두 선수의 기록이 모두 새겨져 있으며, 그들이 남긴 구질·투구 철학·경기 태도는 후배 투수들에게 영원한 교본이 되고 있다.
  • 팬덤 측면에서 볼 때, 부산과 광주·전국에 걸친 열광적 지지 속에서 이 두 거장은 각각의 ‘야구 팬 문화를 대표’한다.
  • 통산 성적만으로 우열을 가리기보다는, 각자의 시대와 팀에 필요한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형태의 레전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누가 더 위대한가’라는 질문에는 명확한 답이 없다. 다만 이들은 각자의 진가를 발휘하여 한국 야구를 한 단계 끌어올린 불멸의 전설임이 분명하다. 두 거장의 발자취를 되새길 때, 우리는 한국 프로야구의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